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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미디어의 미래

한 소설가의 희망없는 언론변호에 대해

by 수레바퀴 2024. 8. 22.

중국의 문호 루쉰은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 위에 난 길과 같다. 원래 땅에는 길이란 게 없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언론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 언젠가는 더 나은 저널리즘을 경험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AI가 생성했다.

언론 현장을 모르면 언론 비평을 쉽게 하면 안 되는 건지, 현장을 모르는 비평은 무소용한 건지, 언론인은 정말 괴로워 하고 있는 건지, 무분별한 비판은 언론(인)의 영향력이나 책임성에 비해 가혹한 건지 등등 기자 출신 한 작가의 주장과 태도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오히려 더 불편한 비평이 더 많이 쏟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현장은 (뉴스에 대해) 제대로 된 소통은 저버린지 오래다. 그 요지부동의 관행과 조직 형편 때문에 말이다. 투자가 빈곤하니 20년 전보다 저널리즘 혁신은 더 소수의 고민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언론이 합당한가? 팬데믹 때 워싱턴포스트에 근무하는 한 한국인 기자와 이메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뉴스 콘텐츠를 생산하려고 동료 기자들과 2~3주의 지난한 토론과 의견을 거친다고 했다. 또 독자와 내부의 사후 평가를 바탕으로 다음 콘텐츠를 기획한다고 했다. 

1천명 넘는 규모의 영어권 매체인 만큼 한국언론과 견주기는 버겁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늘 시간에 쫓기고 기사를 쥐어짜는 언론사를 더는 운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저널리즘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교양의 독자를 발굴하지 않는다면 언론은 왜 존재하는가?

정치적 편가르기의 영역이 아니다. 내가 경험한 언론은 일반적으로는 '독자'가 아니라 기업과 권력뿐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독자는 디지털 생태계가 중심이 된 오늘날 최고의 저널리즘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애석하고 화가 나는 것은 이 지점이다.

기자들이 괴로워 하고 있고, 현장이 어려우니 '기레기'로 잘라 말하는 건 분별력이 없다는 '반박'은 몹시 불편하다. 차라리 (현실이 되지는 못할망정) 독보적 저널리즘을 향해 1천명이 넘는 다양한 출신의 기자들을 고용하고 오직 교양의 독자를 마주하는 언론의 탄생을 제의해야 한다. 

한국은 반세기 동안 조금씩은 진보하였지만 언론은 정신도, 행동도 낙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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