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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극단의 대결정치...언론이 갈등을 푸는 방식

by 수레바퀴 2024. 12. 20.

편견의 승계는 독재의 식성이다(@choijinsoon via X). 언론은 정치인의 갈라치기 태도를 진영을 넘어 비판해야 한다.

양극화된 정치는 양쪽 선동가들에게 더 이용당하여 그들의 동기를 폭로하는 대신 상대에 대한 혐오로 치닫게 한다. 복잡해진 소통의 길은 더 가로막히고 있다. 레거시 미디어가 신뢰를 잃는 것은 각 반대편 정파의 지지자들에겐 유쾌한 일일 수 있지만 잘못된 정보와 선동의 여지는 그만큼 확장된다.

언론이 갈등을 중재, 조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대체로 상업적인 목표 때문이다. 언론의 정치화도 이득의 고리가 있어서다. 이는 언론이 사회적인 갈등을 극복할 방법을 찾도록 돕는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언론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지우는 것으로 사회는 갈등의 뿌리가 깊어진다.

미국처럼 근래 한국 사회의 분열은 '고칠 수 없는 갈등'으로 본다. 정치적, 지역적, 문화적 이유로 서로 갈라선 사람들이 마주칠 때마다 더 격렬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과거의 전통적 대치 전선보다 거칠고 치유가 불가능한 에너지를 쌓고 있다. 연구 과제가 아니라 거대한 위험 요소가 됐다.

이러한 극도의 긴장감이 서린 경계에 서면 "우리는 우리 편을 방어하고 다른 편을 공격하려는 무의식적인 욕구"를 갖는다. "그 불안은 우리를 새로운 정보에 면역으로 만든다. 다시 말해 아무리 많은 조사 보고나 유출된 문서가 있어도 우리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게 된다. 실로 견고한 장벽이다.

크고 다루기 힘든 갈등은 스스로를 부양한다. 우리가 이를 멈추려고 할수록 갈등이 강해지는 것이다. 다양한 가지 수와 난해성으로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것도 힘들다. 이를 증명하는 사이에 갈등은 자체적인,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공동체의 이익과는 반대 방식으로 행동하고 파멸의 씨앗을 뿌린다.

엄청난 갈등의 회오리에 반응하려들면 날선 갈등이 주도권을 잡는 식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각자의 견해가 맹백하게 옳다는 것을 점점 확신한다. 상대방은 비합리적이고 악의적이며 극단적이거나 미쳤다고 맹렬하게 지적한다. 갈등은 갈등을 낳고 우리는 점점 더 당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이 갈등의 사회적 비용은 추산할 수 없이 막대한 규모지만 더 명백한 것은 우리 모두가 결국 손해를 입는다는 점이다. 양측이 뒤엉켜 싸우는 중심에 놓인 갈등은 스스로 폭발하며 “관련된 모든 사람의 존엄성과 성실성을 훼손하고 창의적인 사고와 현명한 해결책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한꺼번에 그리고 빠른 시간 안에 이 원자폭탄 같은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을 푸는 방법은 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언론의 활동과 관련이 깊다. 가장 단순한 접근방식으로는 선거기간 중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함께 등장시켜 진흙탕에서 뒹굴고 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말을 하게 되면 서로 조롱하고 적대시하는 강도와 빈도는 줄어든다. 빈번한 연결은 갈등을 덜 폭력적이고 관대하게 이끄는 경향이 있다. 언론은 렌즈를 넓혀 다른 쪽의 리더가 있다면 더 큰 역사와 스토리에 연결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독자의 편견을 누그러뜨리는 접근이다. 

지난 몇 년간 뉴스를 안 보는 '뉴스 회피층'이 증가했다. 언론을 불신한다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증가했고,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포기하는 동안 우리 모두가 지켜봤다시피 아찔한 일들을 맞이했다. 만약 언론이 갈등에 마주서는 시도를 않는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내란, 내전에 처할 수 있다.

뉴스를 차단하는 사람들 말고도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메신저만 찾는 확증편향도 늘었다. 이를 기초로 자신의 견해를 부정하는 정보에 노출되더라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더 확신한다. 교육·소득수준이 높더라도 이 경향은 커질 수 있다. 자신의 이익과 직접 결부된다고 보고 방어기제도 작동해서다.

언론은 갈등을 다른 쪽의 출처로 반박할 것이 아니라 같은 쪽에서 나온 온건한 입장이나 합리적 평가를 제시하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정치 보도에서 흔한 양비론도 갈등의 난해성만 키운다. 검찰발 받아쓰기 관행도 끝내야 한다. 대신 쟁점을 조목조목 검증하고 공판 중심 보도로 바꿔야 한다. 

미국서 버락 오바마의 '고향'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반대 진영의 인신 공격과 혐오가 넘쳤다. 버락 오바마가 무슬림이 아니라고 말하면 반대편 사람들은 그를 무슬림으로 보는 식이다. 이때 가장 좋은 방법은 오바마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언론은 정확한 정보를 기초로 자기 독자에게 아닌 것은 아니고 맞는 것은 맞다고 해야 한다.

한국 사회의 극단적 갈등에서 언론은 더 이상 중립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스스로 갈등의 스피커가 됐고 심판자가 됐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에선 언론 자신이 이해당사자에 올랐다. 민주헌정이 멈추면 언론도 닫힌다. 기성 언론부터 극단적 갈등을 완화시키는 첫 단추를 끼우는 데 서둘러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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