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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정치 팬덤과 언론 혁신 사이

by 수레바퀴 2024. 4. 19.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채널 배너 이미지. "편파적 방송, 그 러나 그 편파에 이르는 과정은 공정할 것"이라고 쓰여 있다. 기성 언론의 뉴스 신뢰도 저하, 기레기 논란 속에 '편파'에 대한 김어준의 설득이 미묘한 울림을 준다.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채널 등장 배경에는 가능성을 내다본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결심이 컸겠지만 보수 진영의 ‘정치적 오판’도 거들었다. TBS(서울 교통방송) 스피커를 빼앗으면 그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라는 예상은 틀렸다. 무엇보다 메신저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김어준이 IP요 김어준식 소통이 트렌드라는 것을 놓쳤다.

1990년대 후반 PC통신에 이어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팟캐스트 ‘나꼼수’도 먼저 독자의 바람을 읽고 생태계를 뒤흔들었다. 그 경험치는 구독자수, 동시접속자수, 시청조회수, 슈퍼챗 등 유튜브 지표에서 드러났다. 최단기간 신기원을 낳았다. 딴지일보 ‘다스뵈이다’ 등을 아울러 초대형 정치 미디어로 섰다. 주진우(시사) 홍사훈(경제) 탁현민(문화-종방예정) 등 '꼭지'를 넓혔다.   

제도권 언론의 한계를 넘어 진영의 이해당사자를 집결, 교류하는 장으로 자리잡았다. 김어준 뉴스공장장은 정치고관여층을 업고 커뮤니티를 세웠다. 멤버십도 탑재했다. 매주 방청객을 모았다. TBS 뉴스공장 공개방송에 이어 대형 이벤트도 거뜬히 해냈다. 지난 지방선거를 거치며 여론조사기관도 앞세웠다. 고성능 엔진을 단 셈이다. 

최초 최고 최다의 기록도 적지 않다. 한국 언론이 주춤거릴 때 그는 김어준식 혁신으로 이름 석자를 미디어계에 남기고 있다.


"정권심판론 민심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싼 여론조사가 정확하다"를 반복 재생하며 프레임을 짰다. <한겨레>의 관념적 정치비평, <한겨레>식 시시한 중립주의를 정면 돌파했다. 오마이뉴스-노무현, 소셜미디어-문재인이었다면 4.10 총선은 김어준이 선거판을 정의했다. 어젠다를 설정했다. 후보자, 당선자, 낙선자 등 선거 전후의 모든 인물들이 김어준식 살롱으로 들어와서 소통했다. 

20만명 넘게 매일 아침 라이브로 만나는 김어준의 유튜브 채널은 기존의 방송 형식을 차용했지만 갑갑한 격식은 없다. 오늘날 지상파 방송사를 비롯 모든 언론사의 유튜브 채널이 그의 스타일을 닮았다. 시사 정보 채널임에도 '클래식'과 '장단'이 들리는 공연을 넣었고, 패션을 적용했다. 각계의 사람들이 어울렸다. 이 모든 것이 '김어준'으로 흘러가며 메시지로 나왔다. 

김어준은 그동안 세상의 통념, 전통매체의 자만, 겸손이나 성찰의 미덕도 삭제했다. '똥침'으로 질렀고, '시바'로 뱉었다. ‘쫄지 마’로 저항했다. 한국 언론의 '정론' 타령도 뒤틀었다. 오히려 김어준은 편파를 확장했다. 그 과정이 공정하면 문제삼을 수 없다는 식이다. 여론점유율 등 매체지형이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 전통적인 뉴스시장 경쟁환경이 거들었다. 더구나 유튜브 같은 디지털 미디어는 그에게 날개를 줬다.  

레거시 미디어의 동료, 선후배들은 김어준과 그 논리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음모만 들췄고 종결이 없는 허술한 기록자, 무책임한 선동가라고도 했다. 정치 과잉의 침전물에 불과하다는 냉소도 거셌다. 반면 김어준의 채널은 대부분 최초, 최고, 최대의 범위에 들어있다. 기성 언론이 도달하지 못한 이정표다. 미디어 혁신의 결실로 볼 여지도 적지 않다.

김어준식 스타일에 대한 논쟁은 분분했지만 분명하게 남는 사실은 손석희 이후 김어준은 미디어 이용자들로부터 영향력자로 확고히 자리잡은 일이다. 그에 대한 거친 규정과 비평을 단연코 다시 조정해야 할 이유다. 어떤 언론사도 선뜻 나서지 않던 곳에서 뉴스를, 대화를, 독자를 일군 것부터 말이다. 그가 걸어오고 또 나아가고 있는 길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이야기다. 

3년전 김어준 공장장의 모친이 별세했을 때 빈소에서, 그리고 이따금 충정로 딴지일보 카페(다스뵈이다 등 공개방송 현장)서 그를 만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SBS 시사프로그램 녹화장에서, 혜화동 딴지일보에서도 마주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PC통신 천리안 아이디 'OUJOON'을 그리워했고, 또 서서히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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